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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함께하는 세상, 오늘'-이슈판!>천주교광주대교구 가톨릭상장례봉사자회 이만실 회장 인터뷰 전문

노진표 | 2021/04/20 07:57

▣프로그램명: ‘함께하는 세상, 오늘’
▣방송시간: 4월 19일(월), 오후 5시10분∼5시53분(43분)
▣진 행: 김선균 부국장
▣방송출연: 광주대교구 가톨릭상장례봉사자회 이만실 회장

국회에서는 최근 진통 끝에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검 후보 추천위원회가 출범했는데요.
특검에서는 세월호 내 CCTV 조작 여부, 해군과 해경의 세월호 영상녹화장치 수거 과정 등의 수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민감한 내용인만큼 벌써 상당한 진통이 우려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데요. 이처럼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 7년을 맞았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작업은 여전히 더딥니다. 그래서 오늘 이슈판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가톨릭상장례봉사회 이만실 회장 직접 모시고 당시 장례봉사와 못다한 이야기들 나눠봅니다.

(진행자)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먼저 저희 방송 청취자들께 인사부터 해주시죠?


(이만실 회장, 이하 '이 회장')가톨릭 광주 평화방송 청취자님들과 모든 교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나주성당에 다니는 이만실 요한금구입니다. 코로나19가 아직도 끝날 기미가 없어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신앙생활과 철저한 방역을 통해 영육간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진행자)가톨릭상장례봉사회는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에서 장례봉사를 하셨는데요. 당시 몇 분이 함께 활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평소에는 또 어떤 활동들 하고 계십니까

(이 회장)가톨릭 상장례 봉사자회는 팽목항에서 봉사를 시작하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처음 팽목항에 들어갈 때 그 동안 연도회 봉사를 함께 하면서 장례지도사 교육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소지한 분들께 봉사를 청했고 흔쾌히 동참해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동참없이는 봉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그분들에게 강복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 봉사를 시작한 날은 4월 19일이고 10명이 함께 팽목항에 들어 간 후 11월 19일 팽목항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봉사 인원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연인원으로 900 명 정도일거라고 생각되며 가장 많은 날은 30여 명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봉사에 참여하신 분들은 평소에는 각자가 다니는 본당에서 연도회 활동을 통해 하느님께 돌아가신 분들과 그 가족을 위해 활동하고 계시고 국가에서 실시하는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신 분들입니다.
 
천주교광주대교구 가톨릭상장례봉사회 이만실 회장

(진행자)회장님이 기억하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 회장)당시 팽목항은 항만을 확장하기 위한 갯뻘을 매립하여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이어서 황량하기 그지 없었고,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사고 현장에서 구조되어 오는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가족들과 정부 관계자 그리고 각종 봉사자들이 뒤엉켜 침통한 가운데 매우 어수선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저희들이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들은 뒤 저희가 팽목항에 들어간 날은 부활성야였습니다. 성당에 다닌 이후로 부활성야와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지 못한 일은 아마도 처음일 것입니다. 들어간 첫날 부활성야 미사를 봉헌하러 진도성당으로 가던 중 맹골수도 차가운 바다에서 30번째로 구조된 세월호 배 안에서는 맨 처음인 학생을 맞이하러 되돌아 오면서 모두가 한없이 울었던 날이기도 합니다. 저희들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날과 시간들입니다. 참담하고 암담하기만 하던 그 날 저는 하느님의 현존과 주님이신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사랑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이곳에 지금 예수님이 계신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이 계신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떠나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3개월을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짧은 생활은 슬픔과 분노,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5.18 민주항쟁 당시 광주의 해방구 모습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신자들의 생활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서로에게 불평, 불만을 자제함은 물론이고 배려와 나눔의 모습은 말 그대로 천국의 예표인 듯 하였습니다. 

(진행자)회장님은 세월호 참사 7년을 맞은 지난 16일에도 팽목항을 다녀오셨는데요. 이곳도 세월과 함께 많이 변했지요? 어떤 마음으로 다녀오셨습니까?

(이 회장)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팽목항의 모습에 많이 놀랐지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기념관도 남아 있고, 힘든 기억들이 등대와 새로 기억하는 모습 등이 남아 있어서 비록 콘테이너이지만 팽목항 성당이 기억하기 위해 찾아오는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진도항으로 이름을 바꾼다는 데 꼭 진도항으로 바꾸어야 하나, 그냥 팽목항이나 진도 팽목항이라고 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팽목항을 떠올리게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들었습니다. 저는 매년 팽목항에 올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을 떠 올립니다. 그리고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한결같은 부모님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얼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싸늘한 시신 앞에서 “엄마가 미안해”하며 울부짖는 처절한 목소리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맹골수도 쪽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지는 것조차 사치라 생각했고 그 누구도 이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입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국가는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고 그 누구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진행자)회장님은 참사가 발생하고 나흘째 되던 날(19일) 회원 30명과 함께 팽목항으로 가셨는데요. 당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팽목항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회장)회원 30 명이 아니고 처음에 팽목항에 들어간 회원들은 10명이었습니다. 가톨릭 상장례 장례지도사 교육을 마치고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가진 분들을 위주로 선발하였습니다. 들어갈 때 목적은 봉사하기보다는 보건 복지부 공무원들에게 장례상담 절차를 안내하기 위함이었는데 팽목항에 들어 간 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장례상담이 문제가 아니라 차가운 바다에서 구조되어 오는 우리 학생들을 부모님께 곱게 돌려드려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였습니다. 순수히 자발적으로 들어오기는 했습니다만 처음 목적과는 매우 다른 현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일을 어떻게 감당해야하는지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저는 앞으로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수습될 때까지 남고 다른 분들은 생업과 집안 일들을 하도록 순번을 정해 교대하기로 결정하도록 주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회원님들 봉사는 그때부터 아마 7월 초순 정도까지 마치고 저는 마지막 철수하는 11월 19일까지 계속해서 일정을 정해 팽목항을 다녀 왔고 이후 목포 신항으로 세월호를 옮긴 후에도 한 동안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목포 신항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진행자)시간이 갈수록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고민도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어떤 고민들을 하셨습니까?

(이 회장)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누구도 봉사하는 일은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힘들다고 말하는 회원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만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조해 오는 아이들의 신원을 확인해야 하는 신원확인소와 대기하는 가족들의 숙소가 거의 같은 장소에 있던 관계로 웃음 소리는 고사하고 큰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들려오는 가족들의 울음 소리와 함께 해야 했습니다. 또 저희들을 공무원으로 착각한 가족분들께서 화를 내시며 폭력까지 행사하시는 것을 회원님들께서는 신앙의 힘으로 참아 내시는 것을 보면서 이곳에 들어 온 목적을 잠시 잊을 뻔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럴때마다 주님께 힘을 주시라고 기도하였고 회원님들께는 우리가 견디어 내야할 몫이라고 서로 다독이며 이겨내면서 주님께 도와 주시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진행자) 팽목항에서의 자원봉사는 7개월 동안 희생자 265명의 시신을 거뒀는데요. 7개월동안 여정도 잠깐 소개해 주시죠

(이 회장)처음 팽목항에 들어 갈 때는 그래도 우리 애들이 살아 돌아 올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들어 갔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들어 가는 것일까 의아해 하였지만 대부분은 살아 돌아 올 것이고 어쩌다 시신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회원들끼리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망은 사라지고 시신으로 올라 오는 아이들을 구조했다라고 표현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또 유가족이라는 말대신에 가족이라고 해야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 2014년 4월 19일 부활성야에 30번째 학생 구조를 시작으로 10월30일 295번째 학생을 마지막으로 팽목항에서의 봉사활동을 마무리 했습니다. 그 안에 일어났던 여정을 어떻게 말씀드릴 수도 없지만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들어간 날 이후 하루 이틀은 한 사람이라도 살아올 거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삼일 째부터 희망을 내려 놓아야 하는 아픔이 가장 큽니다. 살아 돌아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도 입밖으로 말 못하는 회원들을 보면서 지금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매일 일상이 구조되어 오는 해경선을 맞이하고 그 아이들을 가족 품안에 보내기 위해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사이 시간이 흘러 갔습니다. 매일 구조되어 오는 아이들과 힘들어 하시는 가족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생각도 없이 흘러 갔습니다. 아마도 6월 초순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구조되었고 그 이후는 10월 30일까지 팽목항에서의 일정은 끝이 났습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팽목항에서 철수한 날이11월 19일이고 저는 그들을 떠나 보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한동안 멍한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는 세월호를 목포 신항으로 이동하였고 목포 신항에서 혹시라도 돌아올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까지 마치고 봉사활동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아리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진행자)지금도 기억에 남은 가족들 사연이 있다면 전해주시죠.

(이 회장)신원확인소와 도크에서 구조되어 오는 아이들을 맞이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지만 될 수 있는 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알려고 하지 않아서 별로 가족들 사연은 나중에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서 알게 되어 전해드릴 만한 사연이 없습니다. 또한 봉사자들에게도 교대하면서 여기서 보고 들은 사실은 진도대교를 건너면서 바닷물에 다 던져버리라는 함구령으로 인해 봉사자들끼리도 사연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을 계기로 해서 당시 봉사자분들을 만나서 그동안의 사연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 가지 사연이라기보다 구조된 학생 아버지와 누나가 저희들에게 완전하게 염습 입관을 해서 안산으로 보내달라고 하여 그렇게 조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축구를 좋아하여 축구 선수복을 입히고 축구화도 신기고 마지막으로 축구 공을 관에 넣어 주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분들은 나중에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연입니다만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진행자)회장님과 회원들 고생도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희생자가 나오면 팽목항 앞 바지선 텐트에서 먼저 흙, 해조류를 없애고 깨끗이 닦아냈는데요. 이곳은 시신 보관을 위해 실내온도를 항상 8도로 유지해야 해 회원들은 늘 추위에 떨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회장)저희 봉사자들이야 희생자들과 그들 가족에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만 힘들게 지낸 시간이기는 합니다. 해경선이 맹골수도에서 들어오면 저와 자매님 한 분이 맨 먼저 신원 확인을 위해 여러 가지 유품들과 가족들 확인을 위해 사진 촬영을 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차적으로 도크에서 한 번 닦은 후 119 소방대원들께서 구급차로 신원 검증을 위해 국과수에 보냅니다. 국과수 검증이 끝나면 가족들 확인을 위해 신원확인소로 보내옵니다. 그러면 저희 봉사자들은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뉘어 진 신원확인소에서 여학생은 자매님께서, 남학생은 형제님께서 각각 봉사를 합니다. 가족들에게 그래도 아름답게 보여들여야 하기에 온 정성을 다해 봉사했습니다. 그 봉사하는 모습이 천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꼭 살아있는 자기 자녀들 목욕시키 듯 온 정성을 다하는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다만 시신을 안치해야 하는 까닭으로 원래 냉장을 해야 하는데 냉장 온도를 섭씨 5도 이하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장 여건이 그럴 수 없어서 아예 신원확인소 텐트 자체를 냉장 온도로 맞추기 위해 남 녀 신원확인소에 대형 에어컨 네 대를 설치했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온도를 더 내리기 위해 드라이 아이스로 텐트 틈새를 전부 막았더니 그제서야 온도가 8도 정도 유지 되었습니다.  잠깐씩 들리는 것은 괜찮았지만 초기에는 아예 신원확인소에서 대기하느라 염습 가운을 입고 늘 냉장고 속에 들어 있는 상태이어서 한 겨울을 지내는 듯 했습니다. 거기에다 4, 5월의 팽목항의 밤기온은 겨울 온도 그 이상이기도 해서 담요를 둘러쓰고 있어야만 할 정도이었습니다. 고생들 많이 하셨을 겁니다.
 
(진행자)숙소로 사용된 20m² 정도의 텐트 안에서 30명의 회원이 새우잠을 자고, 끼니는 시민단체에서 주는 밥차에서 해결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요? 

(이 회장)크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사할 때 사용하는 몽골 텐트를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비록 좁고 불편하기는 했어도 구조되어 오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의 처지에 비하면 오히려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웠습니다. 며칠이 지나면서 구조되어 오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구조되어 오면서 봉사자들 손이 많이 필요해서 최고 30 여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기다리느라 그 텐트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새우잠과 더불어 머리를 나란히 하면 자기 힘들어 앞 뒤 좌우 할 것 없이 누어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그때 증거 사진이나 하나 찍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했습니다. 그 당시를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은 믿기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습니다. 세끼 식사 해결은 초창기에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수많은 시민단체와 기업에서 파견나온 봉사자들이 계셔서 큰 어려움 없이 지냈습니다. 팽목항에서 근처에 있는 서망항까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완전한 해방구였습니다. 어느 곳을 가나 식사는 물론이고 필요한 생활 용품을 구하는 것 어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봉사자들의 숫자는 줄어 들면서 스스로 해결하기가 조금 힘들기는 했습니다. 팽목항 근처에는 영업하는 식당이 없었고 가족들 식당은 저희들이 이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행자)가장 보람이 느껴졌던 순간도 궁금합니다?

(이 회장)지금까지 한 명도 살아오지 못한 상태인데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마는 굳이 보람을 찾는다면 구조하는 일을 저희 가톨릭 상장례 봉사자들이 담당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저희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어떤 봉사 단체도 오로지 전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시키셨구나하는 생각이 봉사하는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평생교육원에 국가가 인정하는 장례지도사 교육원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힘들게 개설하여 장례지도사를 약 200 여명 배출한 것이 큰 힘이 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 결과 미약합니다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음에 미리 준비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진행자)이곳에서는 회장님이 염습을 가르친 회원도 함께한 것으로 압니다?

(이 회장)예. 그것도 큰 보람이라고 할 있겠습니다. 가톨릭 상장례 장례지도사 교육에서 배출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가르쳤다기 보다는 저는 그분들과 함께하면서 그분들을 도왔을 뿐입니다. 팽목항에서 봉사하신 모든 분들이 가톨릭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소지하신 분들이었고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갖지 않으신 분들은 처음부터 봉사에 임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어려운 일을 아무런 불평 없이 봉사해 주신 우리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진행자)당시 함께한 회원들에게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마디 해주시죠?

(이 회장)지금도 각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계시겠지만 결코 쉬운 봉사는 결코 아닙니다. 이 일은 특별한 하느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응답이 필요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요즈음 세태가 쉽고 편한 봉사와 얼굴 드러내는 일에는 수많은 봉사자가 몰려 들지만 연도회 활동을 하려는 봉사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 기도만 하는데에는 많은 신자 분들이 함께하지만 염습과 입관을 포함한 전체 상장례 봉사는 하지 않아 많은 힘이 드실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죽으시고 묻히심을 생각하며 돌아기신 분이 정말 예쁜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일을 계속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또 기도하겠습니다.

(진행자)그동안 장례봉사를 하면서 누구보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하셨는데요. 진상규명과 관련해 가장 아쉬운 부분은 무엇입니까?

(이 회장)진상규명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유가족을 제외하고는 진심인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지금도 강하게 듭니다. 어떤 경우는 이일을 자신들의 유불리에 따라 이용하려는 사람들조차 있어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 분들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소중한 게 아니라 죽은 사람도 매우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존귀할뿐더러 죽은 후에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 존귀한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유불 리가 무슨 소용이며 정파가 무슨 소용입니까? 누구라도 배제되어서는 아니되는 소중한 우리 부모요 형제요 자매입니다. 제발 그 죽음 앞에서 겸손해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진상규명을 확실하게 한 후에 그일에 잘못하였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그러한 그들을 용서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정말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습니다. 

(진행자)회장님은 1977년부터 나주성당에서 숨진 이웃을 예를 갖춰 씻기고 의복을 입혀 관에 넣는 염습을 해오고 계신데요. 이렇게 회장님이 마지막 길을 배웅한 고인만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봉사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회장)처음에 봉사하게 된 동기는 나주 성당 두 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방병례 글라라 회장님과 이재영 마태오 회장님이신데요, 두 분 다 하느님 앞에서 저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저에게 아주 좋은 봉사가 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봉사가 아닌데 특별히 금구에게 맡긴다고 하셔서 따라간 자리가 염습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냥 일상사처럼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최후의 심판 때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돌려받을 수 있는 봉사는 참된 사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봉사가 바로 죽은 이들에게 하는 봉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죽은 이들은 아무것도 할 있는 일이 없습니다. 숨쉬는 것 조차도 말입니다. 또 제가 봉사를 하고 난 후에도 제게 돌려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는님의 한없는 사랑이 저를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자로의 죽음에 슬퍼하시면 나자로를 다시 살리신 그 예수님의 사랑때문이라고 한다면 이유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진행자) 처음에는 궂은 일이라고 가족들 만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 회장)성당에서 연도회 어른들을 따라 다닐 때는 제대를 하고 나서 결혼하기 전이어서 반대하는 식구들은 없었지요. 하긴 알지 못할 때이기도 하구요. 문제는 결혼 하고 나서였지요. 전기제품을 파는 가게를 시작했는데 장사는 뒷전이고 연도회 봉사하느라 시간을 많이 뺏겨서 집에는 알리지도 못하고 다녔지요. 그렇지만 알고 난 후에도 크게 반대에 부딪히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되회의 봉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지금은 저의 가장 든든한 원군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제가 아내에게서 더 많이 배우기도 합니다. 단 한 번도 가족에게서 반대를 받아 본 일은 없어서 행복합니다.

(진행자)앞으로 장례봉사를 이어갈 예정이십니까?

(이 회장)어떻게 앞 일을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제 힘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날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에 따라 오는 분들도 많이 양성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봉사해야할 날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진행자)우리 사회가 이웃보다는 ‘내 것’만 챙기는 이기주의가 갈수록 팽배한데요. 끝으로 지역사회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이 회장)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재촉합니다. 내 것이 소중한 만큼 나 이외의 모든 것도 다 소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만이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힘닿는대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남을 위한 배려가 사랑의 첫걸음입니다. 쉽지 않은 일인 줄 잘 압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작권자(c)광주가톨릭평화방송,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작성일 : 2021-04-19 19:52:39     최종수정일 : 2021-04-20 07: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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