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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교> 가톨릭 사제가 들려주는 도덕경 이야기-'홀로 있음과 자신만이 아는 내밀한 것'(2)

광주가톨릭평화방송 | 2019/07/24 15:51

ⓒ 무수한 생각을 하는 인간의 의식을 상징하는 나무,
그러한 의식이 신독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어떨까?
 

프로그램명: ‘향기로운 오후, 주님과 함께


방송시간: 724(), 오후 205220


방송 제작: 조미영 PD, 진행: 박소현 아나운서


주제: 가톨릭 사제가 들려주는 도덕경 이야기-


홀로 있음과 자신만이 아는 내밀한 것”(2)


 


진행자: 신부님, 그럼 여유당이라는 호를 지은 다산은 신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김권일 신부: 우리가 오늘 알아보고자 하는 다산 정약용의 신독 사상은 상제(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산은 한편으로는 윤리적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윤리적 실존을 강조하는 유가 철학자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과 대화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종교적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다산에게서도 신독은 인간 자신을 위한 중요한 수양공부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산에 따르면, 신독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의식할 때 진정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다산은 그가 쓴 중용자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수신의 근본이며, 하느님을 알아야 참되고 헛됨이 없을 수 있다. 하느님을 아는 자는 그 홀로 마주한 상황에서 삼가 할 것이며, 그 홀로 마주한 상황 안에서 삼갈 줄 알면 참되고 헛됨이 없는() 것이다.”


 


다산은 신독의 자신만이 홀로 아는 일로 풀이합니다. 다산의 동시대인들은, 신독을 홀로 있을 때 옷깃을 여미고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앉아 있는 공부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다산은 심경밀험에서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사람이 어째서 구체적인 실제 생활에서는 속임수와 거짓된 행위를 일삼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다산은 진정한 신독은 남들과 함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신독은 자신만이 홀로 아는 일(己所獨知之事)”에서 삼가기를 다하는 공부라고 설명합니다. 다산은 중용자잠에서 군자가 어두운 방 안에 있을 때 두려워하면서 감히 악을 저지르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상제)이 자신에게 임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 다산은 또한 심경밀험에서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을 마주 대하듯이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 신독이라고 말합니다. 다산이 주장한 신독은 성경이 요구하는 깨어있음과 동방교회의 영성이 추구하는 넵시스(Nepsis)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넵시스란 하느님의 현존과 자기 자신 앞에 온전히 깨어 있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다산의 신독 사상에서 종교적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종교적 실존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키에르케고르(Kierkegarrd, 1813-1855)가 말한 종교적 실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탄생과 죽음 앞에서 불안해하는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살아야 하는 불안에 사로잡힌 존재입니다.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절망합니다. 그는 각종 사상이나 종교들 그리고 자연과학의 연구 활동 등 인간의 모든 활동은 사실상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고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게 되는 삶의 방식들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그리고 종교적 실존이 바로 그것입니다. 심미적 실존이란, 감각적으로 아름답고 즐거운 것만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이유를 찾는 삶의 모습입니다. 심미적 실존에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가 없고 또한 미래에 대한 참된 구상도 없습니다. 오직 순간순간의 향락만 중시합니다. 따라서 심미적 실존을 추구하는 사람은 순간순간의 향락을 찾고 추구하기 때문에 이것이 싫증나면 바로 다른 것을 택하는 변덕스런 삶을 삽니다. 때문에 심미적 실존을 사는 사람에게는 일관된 인격과 통일된 인격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윤리적 실존이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고 고결한 인격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윤리적 실존은 이를 마지막까지 해낼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윤리 도덕적 삶을 참으로 철저히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거나 바리사이들처럼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윤리적 실존에서도 인간은 불안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행자: 신부님, 그럼 키에르케고르가 해법으로 제시한 삶이 종교적 실존인가요?

 



김권일 신부: ! 키에르케고르가 해법으로 제시한 종교적 실존이란,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의 모습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신에게 귀의하여 신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며 사는 삶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종교적 실존을 통해서만 인간은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체험 안에서 종교적 실존을 제시한 키에르케고르의 입장과 정약용의 종교적 실존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종교적 실존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하고 윤리도덕의 근거를 내세우기 위한 하느님의 시선과 하느님의 명령이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때문에 다산의 종교적 실존에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보다는 우리를 지켜보시는 두려운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산에게서 신독이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할 때 언제나 하느님을 마주 대하듯이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하느님의 시선으로 나의 생각과 행동을 비추어보며 하느님 뜻에 맞게 생각하고 처신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창세기에 나오는 성경 말씀으로 오늘 이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창세28.16-17)


 


진행자: 가톨릭 사제가 들려주는 도덕경이야기, 오늘은 홀로 있음과 자신만이 아는 내밀한 것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지금까지 영암본당 김권일 신부님과 함께했습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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