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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교> 가톨릭 사제가 들려주는 도덕경 이야기-"나를 넘어서서 너를 섬기는 삶"(2-1)

광주가톨릭평화방송 | 2019/07/03 17:29

ⓒ '로댕'의 대성당, 나와 너와의 만남
 

프로그램명: ‘향기로운 오후, 주님과 함께


방송시간: 73(), 오후 205220


방송 제작: 조미영 PD, 진행: 박소현 아나운서


주제: 가톨릭 사제가 들려주는 도덕경 이야기-


나를 넘어서서 너를 섬기는 삶”(2-1)


 


진행자: 가톨릭 사제가 들려주는 도덕경이야기, 이 시간은 영암본당 김권일 신부님과 함께합니다. 신부님, 오늘은 어떤 이야기로 함께할까요?


 


김권일 신부: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큰 주제는 나를 넘어서 너를 섬기는 삶입니다. 도덕경저자가 시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무위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도덕경저자가 주장한 무위 역시 나를 넘어서 너를 섬기는 삶을 추구하는 삶의 양식에 속합니다. 무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를 넘어서고 나를 극복해야 합니다. 도덕경넘어서고 극복해야 할 나, 유위를 일삼는 나를 꼽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니체와 에리히 프롬, 그리고 마르틴 부버가 주장한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니체는 초인(Übermensch)’을 말하고,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맺음을 말하고, 에리히 프롬은 존재지향적인 삶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이 주장한 삶의 양식들도 모두 나를 넘어서 너를 섬기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도덕경에서 무위는, 의 존재방식이며 동시에 인간이 취해야할 하나의 이상적인 행동양식입니다. 도덕경이 주장하는 무위無爲라는 행동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도덕경에서 무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인 유위有爲에 대해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유위有爲라는 개념은, 도덕경75장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도덕경7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까닭은 그들의 통치자들이 세금을 너무 많이 빼돌려 먹어 버리기 때문이요,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까닭은 그들의 통치자들의 유위有爲 때문이며,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까닭은 그들의 통치자들이 과도하게 자신들의 삶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삶에 집착하여 작위하지 않는 것이 자신만의 삶을 귀히 여기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

 



방금 소개한 도덕경75장은 당시 시대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고발합니다. 첫째, 통치자들이 과도하게 세금을 빼돌려 먹기 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둘째, 통치자가 유위를 일삼기 때문에 백성들에게서 신뢰를 받지 못하고 백성들이 통치자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셋째,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달프고 힘든 나머지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현상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 모두가 다 통치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도덕경75장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신부님, 도덕경전체에 걸쳐서 유위라는 개념은 자주 나오나요?


 



김권일 신부: 앞에서 소개한 도덕경75장에 단 한 번 나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유위는 무위 개념이 등장하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도 놓치지 말아야할 개념입니다. 그리고 유위는 후대 사람들이 무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해 왔기 때문에, 도덕경이 암시하는 유위의 뜻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유위有爲라는 단어는 자와 자가 결합된 것으로 의 행위라는 말입니다. ‘의 행위에서 라는 글자는 얽매이다’, ‘갇힌다라는 뜻을 지닌 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위有爲(갇힌, 얾매인) 행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고대 사전 중 하나인 설문의 풀이에 의하면, ‘라는 글자는 일식이나 월식과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문의 풀이에 비추어볼 때 자는 모종의 장애물에 의해서 가려진 상태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마치 일식이나 월식이 장애물에 가로막혀서 일어난 현상인 것처럼, 자신만의 생각()과 욕심이라는 장애물에 갇히고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온 행위가 곧 유위입니다.


 



진행자: 신부님, 자와 관련하여 일식과 월식을 말하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마르틴 부버의 신의 일식이 떠오릅니다.


 


김권일 신부: .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마르틴 부버는 현대의 종교적 상황을 신의 일식의 시대라고 진단했습니다. 부버에 따르면, 신의 일식이 일어난 이유는, 일식 현상처럼 우리와 신 사이에 어떤 매개물이 끼어들어서 우리가 신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의 일식의 경우처럼, 유위라는 행위는 자신만을 위하는 생각과 욕심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따라서 유위란, 다른 사람이나 뭇 생명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없이 오직 자신만의 생각()과 욕심에 사로잡힌 가운데 행하는 지배욕과 장악의 의지가 담긴 자기중심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유위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욕심대로 행하는 일방적이거나 강제적이고 소통 부재의 행위를 가리키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위에서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고 자기 자신만 중시합니다. 유위에는 주고받는 대화가 없고, 소통이 없으며, 일방적인 명령이나 요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유위를 적게 할 것을 도덕경2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자연에 부합하는 것이다. 세차게 부는 회리바람도 아침 내내 불 수 없고, 소낙비도 하루 종일 내릴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말을 적게 하는 것(希言)’이라는 표현은, 통치자가 명령이나 법령을 적게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통치자의 말이 많으면 즉 통치자의 명령과 법령이 많으면, 마치 세차게 부는 회리바람과 폭우처럼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세차게 부는 회리바람과 폭우가 오래가지 못하듯이 통치자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로 이루어진 정치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통치자의 유위에 의한 정치는, 마치 진 나라가 중국 최초 통일 국가라는 위업을 달성하지만 15년 만에 멸망했듯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가정 안에서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명령이 많으면 그 가정의 평화와 일치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인터넷에 올라 온 글 중에 소통부재(疏通不在)”라는 글이 있어서 여기에 인용해 봅니다. 이 부분을 요셉피나씨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70년 넘게 일생 인간의 정신세계를 집요하게 탐구해 온 산골에 사는 어느 수행자의 집을 방문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그 수행자는 차를 끓이며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말이 끝없이 끝없이 이어졌다. 중간에 말을 자를 수 없어 말이 끝나기를 조심스레 기다렸는데 어느덧 30분이 후딱 지나있었다. 한 순간 문득 머릿 속에 번쩍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저분도 역시 소통부재자이시구나.’ 너무나 많이 보았고 너무나도 익숙해진 풍경이다. 긴긴 세월 영성단체에 속해있다 보니 사회지도층 인사를 만나볼 기회가 꽤 많았다. 그 결론은 이렇다. 우리 사회 성직자는 거의 대부분이 소통부재자이고, 종교인, 지식인, 정치인, 기업가 등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회지도층 인사 중 많은 사람들이 소통에 상당한 장애가 있었다.”


 


소통부재자이시구나”! 이 말은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지적입니다. 현대는 혼자서 자신의 말만 많이 하는 사람보다는, 소설 싯다르타에 나오는 뱃사공 바주데바와 같이 상대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이 그리운 하이터치 시대입니다. 상대를 만나면 자신의 말만 일방적으로 할 뿐 상대의 말은 듣지 않는 자세 즉 소통 부재의 태도는 도덕경저자가 문제 삼고 있는 유위에 속하는 행위입니다. 소통부재의 모습은 강의실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지식 전달만하고 끝나는 주입식 수업도 역시 소통 부재의 유위적인 수업입니다. 학생들에게 좋은 수업은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여 기억에 오래 남는 수업입니다. 기억에 오래 남는 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사람과 학생이 주고받는 쌍방통행의 수업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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